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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기&팁

[여행후기] 인천 중구 여행 1일차 : 100년 전, 인천을 만나다
2016.11.21 16:59 조회수 3,069 신고

 


인천 중구 여행 1일차 : 100년 전, 인천을 만나다
글, 사진 ┌ ⓒ 유랑팩

 

 

 

# 미션투어의 시작, 인천 중구


얼마 전, 인천 중구청과 투어팁스에서 <인천 중구>에 대한 미션투어를 진행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나고 자란 인천 중구를 여행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매일 출퇴근길 졸리고 피곤한 표정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버렸던 100년 넘은 유산들. 그리고 이곳 토박이인 외가 어른들께 전해들었던 옛 이야기들을 털어놓지 못하고 그저 머릿속에 담고만 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지원했었다. 그런데 덜컥 놀랍게도 대상자로 선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내가 사는 (엄밀히 말해 區는 다르지만 필자 역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 사는 곳도 바로 옆 동네이다.) 터를 소개해보고자 비록 출중한 사진 실력을 지니지는 못했었도 카메라를 짊어지고 길을 나서보았다. 

본 글은 인천 중구 여행을 1박2일로 계획했으며 1일차의 테마는 '100년 전, 인천을 만나다', 2일차는 '100년 후, 인천을 그리며'로 설정하였다. 최근 당일치기로 인천 중구 일대, 즉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월미도를 찾는 근교 여행객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 중 차이나타운과 월미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익히 알려진 곳이기에 이 글에서는 따로 코스에 넣지 않았다. 대신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 그리고 덜 알려진 이야기를 싣고자 한다. 

인천은 삼국시대는 물론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서해 바다를 품은 항구가 있어 역사적으로 격변의 현장 중 한 곳이었다. 서울이 옆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장을 하지 못한 것도 있어 보이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구도심을 다시금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인천 중구, 그 중에서도 동인천 일대의 재조명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 역시 미션투어에 지원한 계기가 여기에 있으며 이 글에서도 독자 여러분이 인천, 그리고 인천 중구에 대한 관심을 한층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 인천 중구 여행의 시작 <동인천역, 그리고 우현로>

꽤 오래 전, 인천에도 서울의 명동 못지 않은 곳이 있었으니 지금의 동인천과 신포동 일대가 그러했다. 명동 뿐이랴. 강남의 8학군 부럽지 않은 곳이었고 관공서들이 밀집해있던 곳. 하지만 IMF의 바람이 쓸고 지나간 후 시간이 멈춰버린 곳. 나는 내 고향 인천 중구, 그 중에서도 동인천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내 어머니의 고향이자 외가 어른들의 고향, 그리고 나의 고향. 우리 부모님의 로맨스가 시작된 이 곳. 예나 지금이나 몇몇 곳의 간판과 길만 약간 바뀌었을 뿐 이곳의 향수는 여전하다. 만약 인천은 과연 어떤 곳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면 이곳을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가까이로는 100년 전, 19세기의 근대 개항, 아주 멀리로는 삼국, 고려시대 때 중국과 교류하던 창구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건국 되면서 명나라와의 교역 이외에는 그 기능을 축소시켜버렸고 이로 인해 이곳의 해상교통이 근 500년 간 폐쇄되어 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제물포 개항이 시작되면서 500년 만에 다시 외국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근대 역사 현장의 대표적인 곳이 된 것이다. 


# 여전한 동인천 지하상가 

구 지하상가 쪽으로는 정말 갈 일이 없다. 고백컨대 딱 한 번 가보았을 뿐 늘 나의 방향은 바로 직진해서 퇴근길 마을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오른쪽 신 지하상가(신이 붙지만 이곳 역시 오래 되었다.)로 시내버스를 타러 가거나 친구 어머니 가게에 들릴 뿐이다. 간판과 아케이트 지붕의 녹슬어감을 이렇게 사진으로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다. 매일 필자의 출퇴근 길이자 대학시절 졸린 눈 비벼가며 아침 강의 들으러 가던 등굣길. 물론 현재 대학원 수료까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갑자기 슬퍼진다. 난 언제 논문 다 쓸 수 있을까. 

참고로 왼쪽 지하상가 문 위로 보이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도 이곳을 여행하는 여행객이라면 추천해봄직한 곳이다. 말 그대로 수도국산 꼭대기에 있는데 옛날 일제시대 때 수도국이 이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수도국산이라고 불린 곳이다. 달동네를 이루고 당시의 조선인들은 나라잃은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매일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해 떡목판을 이고지고 떡을 팔러 다녔던 동네. 그렇다. 나의 외할머니 이야기도 저곳에 어려 있으나 이 글에서는 아쉽게도 소개 하지 못했다. 


# 새로 지었던 동인천 역사 건물 

오른쪽으로 주황색 외벽의 건물도 보인다. 아마 인천분들이라면 기억할 듯 싶다. 구월동의 신세계 백화점이 들어오기 전 인천 사람들의 소비를 책임졌던 바로 그 <인천 백화점> 건물이다. 지금도 역사 어딘가에 아주 낡고 오래 된 간판이 희미해져버린 글씨로 '인천 백화점'이 적혀져 있는데 그것을 볼 때 마다 여기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왔던 기억이 난다. 백화점이 없어지고 학교들이 연수동 등으로 빠져나가고 하면서 동인천의 시계는 아직도 그때에 머물러 있다. 최근 다시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것도 같지만 필자의 마음은 자칫 무분별한 개발로 향수가 사라져버릴까 하는 아쉬움, 걱정과 동시에 다시금 활기 넘치고 (대신 향수는 간직한 채, 참 어려운 조건이다.) 시끌벅적했던 순간이 왔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인간의 마음은 참 아이러니. 

그리고 사진 속 지하도 내려가는 곳 주위에 아주 오래 전, 유진 박이 길거리 콘서트를 했던 기억도 난다.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어 연주를 들었었는데. 어린 내가 들어도 소름돋는 그런 연주였다.


# "우리 대한서림 앞에서 만나" 

핸드폰이 없던 시절, 친구와의 약속을 집전화로 하고 이곳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던 기억. 대형서점의 바람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거기에 동인천의 시계가 멈추면서 추억이 가득했던 대한서림도 1층과 2층을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내주고 말았다. 맞은 편에도 서점이 하나 있었는데 잃어버린 시간 동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저 골목 길 안쪽으로 가면 대동문구라는 무척 큰 규모의 문구사가 있었는데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들의 아지트와도 같은 곳이었다. 

 

 

# 첫번째로 갈 곳은 바로 ... 


용동 큰우물, 그리고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이다. 위 사진은 동인천 지하상가 지도이며 오른편에 보이는 삼치거리도 꽤 유명한 곳이다. 지글지글 삼치 구이 덫에 걸리고 싶다면 방문해보시길. 지하상가도 최근 리모델링을 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의 공백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새로운 가게 입점과 완성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듯 하다. 
 

 




#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 

길병원. 아마 많이 들어보았을 병원일 듯 하다. 나의 인생 첫 수술도 길병원에서 했다. 6살 크리스마스 때, 새끼 손가락을 16바늘이나 꿰맸던 수술이었는데 응급실에서 마취도 하지 못하고 바로 수술했던 적이 있다. 아버지는 급한 대로 겨울 외투로 내 얼굴을 가리고 바로 옆에서는 의사 선생님이 꿰매주시고 .... 머릿속에는 왜 병원 이름이 길병원이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길에 있어서 길병원인가 어린 고민을 하다가 나왔던 병원. 

사실 이 기념관이 여기에 있는지는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올해 6월 13일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길여 여사는 의사이자 교수로 널리 알려진 분으로 기념관은 1958년 개원 당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곳이다. 기념관이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이 건물에서 3층으로 이루어진 산부인과를 개원하셨는데 당시에는 처음으로 엘리베이터 시설을 갖춘 병원으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산모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분이 이길여 여사님이다. 옆의 의자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당시 보증금 없는 병원으로도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 분의 박애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며 기념관에서 보다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 용동 큰우물 

 


기념관 바로 옆에 위치한 용동 큰우물. 예전에 비해 예쁘게 단장해 놓은 모습이 좋았다. 주위는 유흥업소들이 있는 골목 안쪽인데 아마 길가 쪽에서는 잘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는 곳이다. 1883년, 고종황제 20년에 만든 우물로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물맛이 좋아 여기서 기른 물로 술을 담가야 손님들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이 주위로 술집들이 많이 생겼었고 지금은 인적이 드물어져 버렸지만 주위에 영업중인 술집들이 몇 군데 남아있을 뿐 이다. 참고로 현판은 유명 서예가이신 박세림 선생님의 것이라고 한다.  

 

 


# 드디어 보금자리를 찾은 <인천학생 6.25 참전관>

 


용동 큰우물 바로 근처로 보금자리를 찾아 드디어 정착한 기념관. 이규원 치과 건물에 위치해 있는데 바로 이규원 치과 의사선생님께서 사재로 운영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하신 기념관이다. 본래 자리는 길 건너 맞은 편쪽에 위치해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올해 6월, 이곳으로 정착했다. 1996년부터 이 기념관을 운영하셨다고 하는데 나 역시 학생 때 부터 이곳을 오며가며 보았던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기념관에 한 번 들어가보았던 적이 있으나 사실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가 이번에 새로이 방문하게 되었다.  

 



지난 2월에는 에디오피아 한국전쟁 참전용사분들에게 4차 후원금을 전달했다는 현수막도 걸려있었다. 이곳에서는 그들이 왜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참전하였는지 그 시대의 아픔을 어렴풋하게나마 우리 후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 듯 하다.  학도병으로 참전하였던 것이 무엇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음을 고하는 어느 학도병 참전용사의 글귀가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의 어지러운 난국에 다시 한 번 새겨볼만한 뜻이 아닐까 싶다. 

 

 


16세 소년병 이경종. 이 분이 이규원 치과 의사선생님의 부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기념관 역시 지나치기 쉬우나 동인천 역에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신포동 시장으로 가는 길목이니 잠시 들러보았으면 하고 소개하는 곳이다. 


 



# 시네마 거리로 알려졌던 경동의 100년 역사를 가진 애관극장 

 


필자는 되도록이면 영화를 이곳에서 자주 보곤 한다. 먹거리도 유명 체인 영화관들에 비하면 부족하고 시설도 다소 낙후되긴 하였지만 요즘같은 시대에 100년 넘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1895년부터 영화관 운영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사진 속 처럼 리모델링한 모습이다. 처음 리모델링 했을 당시에는 옛 모습을 좀 더 살렸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다소 있기는 했지만 사실 그때 이곳을 즐겨찾는 인근 주민들에게는 와우 ~ 놀라운 일이었다. 애관극장이 리모델링을 하다니 ! 

이 일대에는 이곳말고도 인영, 오성, 미림, 지금의 외환은행 자리에는 키네마 극장도 있었고 동방극장 등 정말 많은 극장들이 존재했었다. 오래 전 실미도 영화를 인영극장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는 곳은 애관극장이라 할 수 있으며 미림극장은 동구 화도진쪽에 위치해 있고 지금은 추억 미림극장으로 불리고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 때는 그야말로 시네마 거리였던 경동. 그리고 애관극장. 올해 1월1일, 가족끼리 새해 아침 영화보러 아침에 여기 왔다가 아주 깜짝 놀랐다. 이 근방 사람들이 다 여기로 몰려서 여기서 영화 매진 된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애관극장은 없어지지 않고 이 자리에 오래오래 남아주었으면 하는 소원이 있다. 


100년 된 영화관의 흔한 신작 소식 알림판 ​



#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경인면옥(경인식당)

1946년, 종로에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경인면옥. 우리 가족끼리는 경인면옥으로 주로 부르고 식당 간판은 경인식당이다. 외관도 리모델링을 한 것으로 어머니께서 외할아버지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단골이었다는 식당이다. 70년 전부터 평양냉면의 맛을 쭉 이어오고 있는 식당. 본래 식당이 있던 자리는 현재 주거지로 사용 중이고 지금의 식당 자리도 예전에는 기와집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곳이다. (물론 이 자리에 있던 기와집도 식당 소유였다.) 오래 전에는 식당이 초가집이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나는 알 길이 없고 할머니께 전해들었다. 



식당 탁자에 놓여있는 종이에서 역사의 포스가 느껴진다. 1940년대의 신포동거리를 냉면 그릇 받침 종이에서 발견할 줄이야. 예전에는 이 종이가 없었는데 작년인가 언제 오랜만에 식당에 들렀더니 새로 생겼었다. 이 종이에는 경인면옥이라고 나와있고 종이의 사진 속에서 애관극장이 있는 경동 사거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야트막한 건물들이 즐비했던 이 곳.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냉면 맛은 그대로이다. 위 사진은 평양냉면. 고명의 고기도 실하다. 처음 평양냉면을 맛보는 분들은 평소 식당에서 먹던 냉면과는 달리 심심한 맛에 깜짝 놀라곤 한다. 필자의 경우에는 처음 평양냉면을 접했을 때 부터 특유의 고소한 맛이 좋아서 즐겨 먹곤 한다. 물냉면은 한 그릇이 9천원. 냉면 한 그릇이 뭐 이리 비싸냐 할 수도 있는데 푸짐한 양과 재료와 맛에 대한 자부심의 가치라고 해야할까.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가까이에서 맛볼 수 있는 곳 중 하나인 곳. 사실 식당 소개는 조심스러울 수 있는 주제이나 인천 중구의 숨겨진 곳을 찾는다는 본 글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여겨 소개하게 되었다.

 

 

 

 

이것은 평양온면으로 양이 정말 푸짐하다. 재료들도 신선하고 밑반찬들도 아삭하니 주인분이 정성스레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릇은 놋그릇으로 제공되는데 얼마 전부터 바뀐 듯 하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와는 다른 그릇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만족스러웠던 점심식사였다. 인천 중구를 여행하시는 분들이라면 골목 곳곳에 오랜 역사를 간직한 보물들을 발견하는 재미 또한 느끼실 수 있을 듯 하다.

 

 

 

 

# 인천의 가장 오래 된 상설시장 '신포 국제시장'


국제시장이라는 이름 그대로 개항기 때 근처 청나라, 일본인 조계지를 끼고 있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입구였던 곳이다. 뒤로는 철로가 있어 서울과 연결되고 앞으로는 인천 앞바다가 있어 포구를 갖고 있으니 신포라는 지명의 '포'처럼 교통의 요충지라 할 수 있는 곳에 이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신포라는 지명은 일제 해방 이후에 변경된 지명으로 옛부터 '포'자가 들어간 동네이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95년 탔던 협궤열차의 경적 소리도 이곳 근처에서 울려퍼졌고 인천 중구는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과 문물의 관문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적으로 신포 국제시장이 번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곳 이외에도 가까이로는 인천 동구의 중앙시장이 이곳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었다. 

그만큼 많은 물건들이 거래되었고 여기에 없는 물건은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말까지 돌았다고 하니 종로를 사람이 구름처럼 많다 하여 운종가(雲鐘街)라고 불렀던 것처럼 인천의 운종가가 바로 이곳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리고 신포시장의 명물이 된 닭강정. 지금은 아케이드 지붕도 생기고 바닥도 2000년대 초반에 새로 정비하여 깨끗해졌다. 그리고 닭강정을 사러 주말이면 몰려드는 여행객들로 시장 안의 가게들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대학 시절, 친구들이 닭강정을 사오라고 하여 여기서부터 아주 밀봉을 하여 학교까지 사가지고 갔던 적이 있었다. 닭강정의 군침 흐르는 그 향이 조금이라도 전철안에 퍼질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했던 그 날이 슬몃 떠오른다. 물론 그 뒤로 다시는 집을 제외한 곳에 사간 적은 없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사진 속 닭 캐릭터도 생겼나보다. 포토존까지 있길 래 한 장 담아보았다. 의외로 닭이 꽤 귀엽게도 생겼다. 

 

 


# 인천의 명동이었던 신포동


신포 시장 골목 끝에 다다르면 사진 속과 같은 뒷길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저 밑으로 쭉 내려가면 인천 우체국도 만날 수 있고 필자가 사진을 찍은 곳은 신포 문화의 거리 쪽에서 담은 것이다. 인천의 명동이었던 이곳은 부모님 세대 때, 아주 핫한 데이트 장소였다. 나의 부모님 역시 이 일대에서 자주 데이트를 하시곤 했는데 90년대 초까지는 그래도 그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 IMF를 겪고 인천백화점이 없어지면서 이곳 또한 그 때의 이야기는 흘러가버린 것이 되고 말았다. 

아참, 저 길목에 신포우리만두와 청실홍실이 자리하고 있다. 신포우리만두는 인사동에도 가게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전까지는 당연히 신포동에만 있는 가게인줄 알았다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언제 체인화가 된 건가 싶었는데 그 본점이 바로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어렸을 때 여기서 새우만두가 처음 나왔던 날, 아버지께서 사가지고 오셨던 기억도 나고 ...... 그뒤로 한동안 새우만두 앓이를 했었더랬다. 그리고 청실홍실은 판모밀로 유명해진 곳. 주안에도 분점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새 또 다시 일 년이 흘렀나보다. 얼마전 까지 없던 대형 트리가 신포문화의 거리 끝자락에 세워졌다. 이 길목에서 60년도에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여고생들의 시위가 있었다고 외할머니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지금은 인천여고가 연수동으로 몇 년 전 이전을 하면서 이곳에 남아있는 여고는 인일여고와 인성여고가 있다. 

 

 

 


# 1883년 인천 개항장 

 


인성 초등학교 앞에 있는 개항장 표지판에 근대문화역사탐방, 역사문화의 거리라고 적혀있다. 여기서는 공화춘, 인천우체국, 인천시 중구청, 성공회성당, 답동성당, 은행 건물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일대에 모두 있는 곳들로 최근 중구에서 여행객들에게 근대 개항이라는 테마를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중구 뿐 만 아니라 인천 전체의 대표가 될만한 유적지가 아닌가 싶다. 

 

 


# 1908년에 만들어진 홍예문

 


신포동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볼 수 있는 홍예문. 양쪽으로 차가 다니는 길이라 아슬아슬하게 걷곤 하지만 지나다니는 차량이 그리 많지는 않다. 어렸을 때는 이 문이 참 크게 느껴져서 저 문으로 들어가면 거인이 사는 줄 알았다.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려면 야트막한 산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응봉산이라 부른다. 일본 공병대가 만든 문으로 이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 문을 뚫었다고 한다. 저 문 위에 올라가면 인천항 쪽을 조망할 수 있고 최근 몇 년 동안 이 주위로 작은 개인 카페들이 많이 생겨났다. 지금도 영흥도까지 바라다보이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홍예문 사진을 자세히 바라다보면 자동차 오른쪽으로 웬 <흰색 조각상>이 얼핏 보인다. 차가 지나다니는 중이라 저 쪽에 접근해서 찍지는 못하였는데 저 조각상을 어렸을 때는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가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박영성 화백의 작품이라고 한다. 서양화가이신 분으로 소라껍데기를 형상화한 것이라는데 그저 지나치곤 했던 작품이 50년이 넘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 홍예문을 자유공원 가는 길에 들른다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저 길목을 50년 동안 지켜왔을 조각상에게 잘 있었냐는 말 한마디 건넨다면 어떨까.  

 

 

 

 

 

 

 

 

 

 

 


# 자유공원의 인천학도의용대 6.25 참전 기념탑 

인천 중구는 앞서 언급했듯이 바다를 끼고 있다. 그리고 6.25 전쟁의 기념비와 그 흔적들이 곳곳에 비문으로 많이 남아있다. 예컨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놀이터 한 켠에는 그곳이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이 상륙했던 지점 중 한 곳이라는 푯말이 서있다. 위 기념탑 역시 인천학도의용대의 희생을 기리는 곳으로 자유공원 메인 광장으로 향하는 길목 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자유공원의 벚꽃과 단풍은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올해의 단풍이 어우러지는 기념탑의 모습이 그 분들의 넋을 감싸주는 듯 하다.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 '자유공원'


구한말 시기, 외세 열강의 파도가 거침없이 몰아치던 시기에 이 일대에 살던 외국인들을 위하여 만든 공원이 바로 자유공원이었다. 1888년 당시 이름은 만국공원으로 불렸으나 1957년에 지금의 자유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이 공원으로 사생대회를 온 적도 많았고 소풍을 자주 오곤 했다. 물론 아기였을 때도 월미도는 물론 자유공원에서 찍은 사진들이 앨범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로 위 사진의 큰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플라타너스 나무>이다. 아마 자유공원 광장에 서서 인천항 쪽을 바라다보면 바로 아래 보이는 이 나무를 놓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령은 올해 132년이고 1888년에 자유공원이 만국공원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부터 있었다고 한다. 

알고보면 이 나무가 역사의 산증인인 것이다. 개항의 시작과 인천항을 통한 일제의 수탈,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6.25전쟁까지 모두 지켜보았을 나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상륙지점 중 하나라는 이야기가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상륙 그 이듬해에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최고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바로 그때 남긴 말이라고 한다. 6.25 전쟁 때 남겨진 방공호가 자유공원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필자는 아직 방공호를 찾아가 보진 못했다. 집안 어른들의 말씀으로는 이 동상 근처와 자유공원 내 석정루(팔각정) 근처에 하나가 더 있다는데 과거에는 여러 개의 방공호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어디서 관리하고 있는지 실제로 물건들을 넣어둔 것인지는 이 날 확인할 순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곳 내부로 아직 오래 전의 기억들을 안고 있는 응봉산 일대 .... 

아참, 아마 인천분들이라면 어렸을 적 자주 놀러갔던 수봉공원을 기억하실 것이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아마 어릴 적 사진 앨범에 수봉공원에서 찍은 사진 한두장은 있으실텐데 (부평쪽 사시는 분들은 어디로 많이 소풍 가셨었는지요.) 그 수봉공원에 있던 놀이기구들이 원래는 여기 자유공원에 있던 것이었다. 70년대 까지는 이곳에 놀이기구가 있다가 80년대에 수봉공원으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몇 년 전 공원을 찾아가니 이미 문을 닫고 들어갈 수 없었다. 

여담이지만 수봉공원은 수봉산에 있는 공원으로 지금은 공원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오르면 동인천 쪽과 남구쪽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높지않은 야트막한 산이고 주위에 큰 건물이 별로 없어 조망이 좋다. 구 시가지가 잘 정비된다면 남구의 몽마르트 언덕이 될 법한 곳이다. 

 

 


# 인천항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메인광장과 더불어 석정루(팔각정)으로

1966년에 만들어진 석정루. 가을에는 단풍이 예쁘고 겨울에는 눈 내린 팔각 지붕이 예쁘고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언젠가 사계의 모습을 한번 담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장소인데 아직 게으름으로 인해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 알림 표지 '각국조계표지석'

청나라, 일본, 그리고 각국. 많은 외국인들이 개항 당시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러자 청나라는 청나라 사람들끼리, 일본은 일본 사람들끼리, 그리고 그 외 다른 국가 사람들끼리 거주지역을 나누었는데 이를 조계라고 부른다. 청국조계, 일본조계, 각국조계 이런식으로 3개의 조계지가 생겨났고 이 경계에 세워진 것이 바로 이 표지석이었다. 원본은 현재 인천 시립박물관에 보관중으로 이 표지석은 제물포구락부 계단 아랫길에서 안내판을 찾아볼 수 있다. 


# 정원이 있는 인천역사자료관

각국조계표지석 바로 앞에 위치한 인천역사자료관. 방문하였을 당시 내부사정으로 안에는 자료관 안에는 볼 수 없었고 외관만 담아올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작은 길에 아담한 정원이 있는데 서양 외국인 여행객 3명이 앉아 쉬고 있었다. 이곳은 현재 인천의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발간하는 기관인데 본래는 일제시대 때, 어느 일본 사업가의 저택이었고 그 뒤로 레스토랑, 사교클럽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을 지금의 한옥건물로 다시 세우고 60년대에는 시장이 머무는 공관으로 사용하다가 2001년에 자료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단풍과 한옥의 색감이 너무 좋았던 순간이었다. 




# 이름이 뭐 이래 했던 '제물포 구락부'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아니 대체 구락부가 뭐야 했는데 일본 발음으로 클럽을 구락부라고 한 것이었다. 그때의 알 수 없는 놀라움이란 ..... 근대 개항기인 1901년에 지어진 건물에 클럽이 붙었다는 것은 서양사람들이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벽돌건물로 여러 각국의 외국인들이 모여 사교장으로 이용했던 곳으로 지금은 여러 전시회와 이곳을 알리는 팜플릿, 안내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실내 모습은 당시 인테리어를 재현해 놓았는데 나무로 된 내부장식이 여기 어딘가에 놓였을 당구대와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을 더한다. 

여기 제물포 구락부에서 운영하던 테니스장, 정확히는 정구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외할머니께서도 자신의 시어머니, 나의 외증조할머니께 들었던 것이라고 하셨다. 거기에서 외국인들이 공놀이(아마도 테니스나 정구였을 것이라고 외할머니께서는 한 마디 덧붙여주셨다.)를 하곤 했는데 멀리서 그 장면을 길을 오가며 자주 보셨다고 한다. 그 자리가 어디였을지 궁금하다. 


# 왼쪽은 청국조계지, 오른쪽은 일본조계지, 저 위에는 공자상과 삼국지 벽화거리 

조계지 계단의 모습으로 이곳을 기준으로 왼쪽은 청나라 사람들이 살던 구역이었고 오른쪽은 일본인들이 살던 구역이었다. 저 위로는 여행객들에게 유명한 차이나타운이 이어지는 길목으로 삼국지 벽화거리가 있다. 본 글에서는 글의 처음에서 밝힌 바와 같이 차이나타운 거리쪽은 소개하지 않고 있다. 그저 차이나타운 이외에도 자유공원과 그 주변에 알고보면 의미있는 역사적 장소들이 많이 숨어있음을 독자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했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가면 청나라 사람들 조계지, 즉 지금의 차이나타운쪽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오른쪽은 일본인들이 살았던 거리이기 때문에 최근 일본인 거리로 탈바꿈 하면서 일본식 목조건물의 외관을 지닌 건물들로 바뀌어서 차이나타운 쪽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 다시 부활중인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자 커피를 판매했던 '대불호텔'

그동안은 주차장 앞으로 이곳이 대불호텔이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판만 있었는데 그 터가 다시 발굴되면서 현재 당시 모습을 재현한 건물이 건축 중이다. 공사명은 대불호텔터 활용 전시관 조성공사라고 하는데 문화 및 집회시설(전시장)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공사장 펜스에 완공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긴 했지만 뭔가 스포일러를 제공하는 것 같아 담아오진 않았다. 

당시 외국인들의 인기가 높았던 호텔이었고 최초의 서구식 호텔, 최초로 커피 판매했던 수식어가 서울에 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모두 인천, 그리고 이곳에 있었다. 근대 개항의 시작인 곳이라 그런지 '최초'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곳이다.



#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일본인 거리에 있는 은행 건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 위로 조선은행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으며 9살 어느 추운 겨울 날, 아빠가 이 건물 앞에서 찍어주신 사진이 앨범 어딘가에 있다. 이쪽 거리에 은행건물 이었던 건축물들이 몇 군데 있으며 모두 자료관과 전시관으로 운영중인데 현금 500원 가량의 별도 입장료가 있으니 방문하실 분들이라면 참고하시길.


#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건물 '일본제18은행 지점'

지금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1890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은행들이 그렇듯 일본이 우리나라의 금융업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들어온 것들이었다. 군산에도 이 은행의 지점건물이 있다고 한다.  이곳 또한 500원의 입장료가 있으니 전시관을 둘러보고자 한다면 미리 동전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 일본인 거리의 모습 

50년이 넘은 기존 건물을 허물고 이곳 분위기에 맞게 다시 지은 관동교회의 모습도 얼핏 보인다. 일본인 거리하면 외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일왕이 항복선언을 라디오로 발표하던 해방 날,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이 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엎드려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쥐도 새도 모르게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버렸는데 그들이 살던 집에는 조선인들이 갖기 힘들었던 목화솜 이불이 많았다. 때문에 이 이불을 사람들이 빼다가 집에 두었는데 행여나 누가 가져갈까봐 할머니는 다른 이불을 찾으러 가면서 당시 꼬맹이었던 큰이모를 이불 위에 앉혀두고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 했었다고 하셨다. 

이 인근에서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해 한국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떡을 팔았다고 하는데 그 떡을 만들었던 방앗간이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하였던 수도국산 어딘가에 위치한 동굴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동굴을 찾을 수가 없는데 그 동굴 안에서 떡을 만들어서 목판에 지고 팔러 다니셨고 행여나 일본 순사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남의 집 마당안으로 숨어들어가 순사가 지나갈 때까지 몸을 피하셨다고 ... 조선 땅에서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갖은 수모를 겪다가 해방하던 그 날을 외할머니는 잊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지금은 이렇게 아기자기한 카페들도 많이 생기고 주말이면 가족 혹은 연인과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100년 전 이곳은 우리 앞 세대들의 아픔과 슬픔이 있었던 일제 강점기 수탈의 현장이기도 했고 6.25때는 피난민들의 행렬과 이곳을 지켜내고자 했던 국군장병들의 치열했던 전장이기도 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지금까지의 흔적이 뒤엉켜 어딘가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에 묻혀있을지도 모르는 그 발자취들. 이렇게 우리는 잠시나마 100년 전, 인천 중구의 모습을 엿보았고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를 따라 용유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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